오늘은 하나님의 존재와 믿음의 문제를 수학적인 측면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수학을 좋아하지 않으시는 분들도 영화나 소설에서 “4 차원의 세계”니 뭐니 하는 말들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 외에도 영화관 같은 곳에서 2 차원 영상이니 3 차원 영상이니 하는 말들을 한다. 4 차원 세계가 나오는 영화를 보면 갑자기 공중에서 무언가가 휙하고 나타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과연 과학적 근거는 있는 이야기일까? 그럼 ‘차원’(dimension)은 과연 무엇일까?
초등학교 시절 배운 수직선을 생각하여 보자. 수직선상의 점은 숫자 하나로 표현된다. 0 이 가운데 있고 그 오른쪽에는 1,2,3, 그리고 그 왼쪽에는 차례대로 -1,-2,-3 뭐 이런 식이다. 그래서 수직선 상의 한 점은 숫자 하나로 표현된다. 그것이 바로 1 차원의 세계이다.
2 차원 세계는 중학교때 배웠음직한 좌표평면이다. 좌표 평면상의 점은 숫자 두 개(x 좌표, y좌표)의 쌍으로 표현된다. 점의 위치가 숫자 두개로 표시되기 때문에 2 차원이라 부른다. 마찬가지로 3 차원은 동서를 나타내는 x 축, 남북을 나타내는 y 축, 그리고 높낮이를 나타내는 z 축이 있어서 점의 위치가 숫자 세개로 표시된다. 우리가 살고있는 공간이 3 차원의 세계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안다.
그럼 4 차원의 세계는? 타임머신 영화를 많이 보신 분들이나 무슨 과학책등을 읽으신 분들은 4 차원이 무슨 ‘시간’이니 하는 소리를 듣기도 하셨겠지만 4 차원부터는 점의 위치가 4 개 이상의 숫자로 표현되는 가상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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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원에 사는 개구리를 생각해 보자. 1 차원에 사는 개구리는 수직선이 자신이 알고 있는 공간의 전부이다. 그리고 위 그림처럼 수직선을 따라 좌우로만 움직이고 그 위의 것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2 차원에 사는 두꺼비를 전혀 상상할 수 조차 없다. 그런데 가끔 2 차원에 사는 두꺼비가 수직선을 넘나들때가 있다. 1 차원에 사는 개구리로서는 참 희안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에서는 모든 것들은 좌우로만 움직여야 하는데(수직선밖에 없으니까) 갑자기 위아래로도 움직이는 놈이 나타나서 휙 보였다가 휙 없어지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2 차원에 있는 두꺼비가 아무리 개구리 근처(수직선 근처)에 있어도 1 차원의 개구리를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아마도 세상에 두꺼비는 없다고 말할 것이고.
이사야서 55 장 8 절-9 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수학적으로 풀이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높은 차원의 공간에 사신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이 수학책이 아닌 고로 아마 저렇게 기록하셨을 것이고.
1 차원의 개구리가 2 차원의 두꺼비를 직접 보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직접 본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두꺼비는 없다고 말하는 개구리처럼.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개구리에게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두꺼비는 개구리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실제로는 아주 아주 가까이 있기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바로 우리 옆에 계시고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공간은 우리가 있는 공간보다 차원이 높아서 우리는 직접 하나님을 볼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두꺼비의 숨결이 개구리에게 느껴지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다. 단지 우리가 둔하여 느끼지 못할 뿐이지. 두꺼비가 없다고 단언하는 개구리가 어리석듯이 하나님이 없다고 단언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어리석을 뿐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니라”.
그런데 1 차원에 사는 개구리가 2 차원에 사는 두꺼비의 존재를 인식한다고 하여도 그 두꺼비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개구리는 아무리 똑똑해도 1 차원에 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개구리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2 차원의 두꺼비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여도 되지 않는 부분이 남아 있는 것이다. 개구리는 남북 방향으로는 움직일 수 없기에. 하지만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서도 있다.
하늘을 나는 새는 3 차원을 날아가지만 땅 위(2 차원)에 그림자를 그리며 날아간다. 수학적으로는 이것을 정사영(projection)이라고 부른다. 그 그림자를 보는 2 차원의 두더지는 새가 정확하게 어떻게 어디로 날았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그림자를 통하여 대강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다. 1 차원의 개구리도 두꺼비의 그림자를 통해 대강 두꺼비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곳곳에 나타난다. 이것이 성령님의 정사영(그림자)인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그림자와 새와는 위치에 차이가 있다. 그 부분을 해석하는 것은 새를 보았던 두더지마다 조금씩 다를 수가 있다. 아마도 그 차이가 각각 다른 교단을 만든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차이는 개구리로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기에, 결국 어느정도 맹목적인 믿음을 개구리에게 요구한다. 이 부분이 바로 우리의 ‘신앙’인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 백퍼센트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과학이지 믿음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라고 말하면 우리는 다들 그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과학적으로 관찰이 가능하고 증명이 가능한 사실은 이해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그만큼 믿기 힘들다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하다. 엄마에게 “난 엄마가 내 엄마인 것을 믿어요”라고 매일 이야기하는 아이는 없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신앙의 과정은 새와 그림자의 차이를 고민하는 두더지와 같은 것이 아닐까. 그림자로 비추어지는 하나님의 모습과 2 천년전에 우리의 공간에 나타나셨던 기록을 생각하며 그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것이 결국 우리 신앙의 과정인 것이다. 우리 교회 성도 모두가 서로 협력해서 그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차근 차근 찾아나가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한복음 20:29)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아 29:13)


과연 수학자다운 명쾌한 설법입니다. 이집사님의 글이 내 마음을 질서정연하게 다시 정돈시켜주었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